[노벨상으로 읽는 화학사] Vol.11 두 번의 노벨상, 방사능 연구로 과학계를 흔든 마리 퀴리
2026. 09. 15
과학이 빠르게 발전하던 근대, 전 세계에서 수많은 과학자가 등장하고 새로운 이론이 쏟아지던 시기에 현대 화학과 물리학의 흐름을 바꾼 위인이 나타납니다. 여성이 대학에서 공부하기조차 어려웠던 시대에 과학의 꽃을 피워낸 위대한 과학자, 마리 퀴리(Marie Curie)입니다.
• 세계 최초의 노벨상 2회 수상자
• 여성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 방사능 연구의 선구자
수많은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니지만, 그 삶은 명성만큼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뛰어난 재능과 천재성을 지녔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들보다 적은 기회를 얻어야 했고, 그 때문에 그의 끈기와 열정은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두 번의 노벨상은 그녀가 이룬 업적과 과학자로서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평생 노력한 과정을 과학계가 인정한 결과였습니다.
마리가 방사능을 연구하지 않았다면 현대의 원자와 에너지에 대한 이해는 지금과 크게 달라졌을 것이며, 오늘날의 핵과학과 의료 영상기술, 방사선 치료 역시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는 어떻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방사능이 원자 자체의 성질임을 밝혀내고, 이를 새로운 원소를 찾아내는 도구로 발전시켰을까요? 그 위대한 여정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마리 퀴리는 1867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Maria Skłodowska)’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교사였던 부모는 모두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당시 바르샤바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여성에게는 대학 교육의 기회도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원하는 만큼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와 언니 브로냐는 서로의 학업을 돕기로 약속했습니다. 먼저 마리아가 가정교사로 일하며 언니의 파리 유학을 지원하고, 브로냐가 학위를 받은 뒤에는 마리아의 학업 비용을 돕기로 한 것입니다. 브로냐는 의사가 된 뒤 의사인 남편과 함께 파리에 살면서 마리아를 초대했습니다. 그리하여 1891년, 마리아는 스물네 살의 나이에 마침내 프랑스 파리로 향했습니다.
파리에서 마리아는 이름을 프랑스식인 ‘마리’로 바꾸고 소르본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습니다. 낯선 언어와 빠듯한 생활 속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곧 연구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던 1894년, 마리는 든든한 연구 파트너이자 훗날의 배우자인 피에르 퀴리를 만났습니다. 피에르는 결정과 전기, 자성을 연구하며 정밀 측정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있던 물리학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이후 함께 연구하며 큰 업적을 쌓게 됩니다.
마리의 연구를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 과학자들이 관찰하던 ‘방사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895년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Wilhelm Röntgen)은 X선을 발견했습니다. X선은 전기 장치에서 만들어지는 고에너지 전자기파로, 물질을 통과하는 정도가 물질의 종류와 두께에 따라 달라집니다. 뼈처럼 밀도가 높은 부분은 X선을 많이 흡수하고, 연한 조직은 비교적 잘 통과시키기 때문에 몸속 구조를 사진처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듬해인 1896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Henri Becquerel)은 우라늄 화합물이 빛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사진 건판에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라늄에서 X선과 비슷한 성질을 지닌 방사선이 계속 방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는 이처럼 외부 자극 없이 물질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에 주목했습니다. 방사선이 공기를 *이온화하면 전류가 흐르는데, 마리는 아주 미세한 전류의 차이를 측정하면서 여러 우라늄 화합물에서 나오는 방사선의 세기를 하나씩 비교했습니다. 그러던 중 중요한 규칙을 발견했습니다.
우라늄이 다른 원소와 결합해 어떤 화합물이 되더라도 방사선의 세기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우라늄의 양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물질의 모양이나 화학적 상태가 달라져도 이 성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리는 여기서 방사선을 내는 성질이 원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분자나 화합물의 구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라늄 원자 자체가 가진 성질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물질이 스스로 방사선을 내보내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방사능(Radioactivity)’이라는 용어를 도입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익숙한 용어지만, 당시에는 원자 스스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생각이 매우 획기적이었습니다. 마리는 우라늄 외에도 이런 현상을 보이는 원소가 있을지 조사했고, 토륨 역시 우라늄과 비슷한 방사선을 낸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광물을 조사하던 중, 마리는 수상한 값을 마주합니다.
*사진 건판: 오늘날의 카메라 필름처럼 빛이나 방사선에 반응해 흔적을 남기는 판
*이온화: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와 분자에서 전자를 떼어놓은 현상
마리가 조사한 광물 가운데에는 ‘피치블렌드(Pitchblende)’라는 우라늄 광석이 있었습니다. 우라늄이 포함된 광물이니 어느 정도 방사능을 나타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측정 결과는 예상과 달랐습니다. 일부 피치블렌드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우라늄의 양으로 계산한 것보다 약 네 배나 강한 방사능을 나타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마리가 앞선 실험을 통해 확인한 규칙대로라면, 우라늄이 일정량 들어 있을 때 나타나는 방사능의 세기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수치는 그 예상을 크게 넘어섰습니다. 마리는 이를 단순한 실험 오차로 넘기지 않았습니다.
‘피치블렌드 안에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방사능을 가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원소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마리의 가설에 흥미를 느낀 피에르도 연구에 합류했고, 두 사람은 피치블렌드 안에서 강한 방사능을 나타내는 성분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피치블렌드를 여러 성분으로 나눈 뒤 각각의 방사능을 측정했습니다. 방사능이 강한 성분을 다시 나누고, 또 측정했습니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강한 방사능을 내는 물질에 점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1898년 7월, 마리와 피에르는 마침내 새로운 방사성 물질의 존재를 발표했습니다.
마리는 이 물질에 자신의 고향 폴란드를 뜻하는 ‘폴로늄(Polonium)’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폴로늄을 분리한 뒤에도 여전히 강한 방사능이 측정되자, 두 사람은 추적을 이어갔습니다. 그 결과 같은 해 12월, 또 하나의 새로운 원소를 발견합니다. ‘광선’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당시 ‘기적의 물질’로 여겨질 정도로 사회적 열풍을 불러일으킨 ‘라듐(Radium)’입니다.
1903년,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여성이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정식 교육을 받거나 연구자로 인정받기조차 어려운 시대에, 과학자로서 국제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상 가운데 하나인 노벨상을 받은 여성이 탄생한 것입니다. 마리의 이름이 제3회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서 앙리 베크렐, 피에르 퀴리와 함께 불리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추천조차 받지 못했지만, 피에르는 자신이 후보로 고려된다면 방사능 연구를 함께한 마리도 반드시 평가받아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 결과 마리는 피에르와 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으며, 세계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라는 역사적 기록을 세웠습니다. 마리는 단순히 남편의 연구를 도운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물리 현상을 함께 밝혀낸 독립적인 연구자였고, 그 사실이 마침내 노벨상으로 인정받은 것입니다. 또한 같은 해 방사성 물질 연구에 관한 박사 논문을 발표하며 박사 학위도 받았습니다.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의 핵심은 방사능이라는 새로운 물리 현상을 발견하고 그 성질을 연구한 것이었습니다. 베크렐은 우라늄에서 자연적으로 방사선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마리와 피에르는 이 현상을 체계적으로 조사했습니다. 마리는 우라늄에서 나오는 방사선의 세기를 측정하며 방사능을 정량적으로 연구했고, 방사능이 물질의 화학적 상태나 분자 배열이 아니라 원자 자체의 성질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을 밝혀냈습니다. 이는 원자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단순한 입자라는 당시의 생각을 흔드는 중요한 물리학적 발견이었습니다.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뒤에도 마리와 피에르는 라듐을 더 순수하게 분리하고 그 성질을 규명하는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라듐은 광석 속에 극소량만 들어 있었고, 화학적 성질이 바륨과 매우 비슷해 분리하기가 몹시 까다로웠습니다. 마리가 활용한 방법은 분별결정(Fractional Crystallization)이었습니다. 두 물질의 용해도가 아주 조금 다를 때, 용액에서 결정을 여러 차례 만들어 그 차이를 이용해 조금씩 분리하는 방법입니다.
라듐은 양이 너무 적어 무게만으로 추적하기 어려웠습니다. 마리는 대신 방사능의 세기를 라듐의 위치를 알려주는 단서로 활용했습니다. 1911년 노벨 강연에서 그녀는 방사성 물질을 연구할 때 때로는 저울보다 전위계가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극미량의 물질도 고유한 특성을 정밀하게 측정하면 찾아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리는 한 번에 약 20kg씩 광석 잔여물을 처리하며, 결국 수 톤에 이르는 물질을 다뤘습니다. 순수한 라듐염을 얻기 위해 결정화 작업을 수천 번 반복했고, 라듐이 많이 농축될수록 기존 물질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새로운 스펙트럼선이 뚜렷해졌습니다. 또한 원자량을 반복해서 측정한 결과, 라듐의 원자량은 약 226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처럼 스펙트럼과 원자량에 관한 증거가 쌓이면서 라듐은 바륨과 구별되는 독립된 화학 원소로 확실히 자리 잡았습니다.
1906년에는 예상하지 못한 비극이 찾아왔습니다. 피에르가 파리의 거리에서 마차에 치이는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함께 진행하던 연구는 이제 마리 혼자 이어가야 했습니다. 마리는 피에르가 맡았던 소르본의 교수직을 이어받아 소르본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습니다.
마리는 피에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라듐의 원자량과 화합물, 화학적 성질을 더욱 체계적으로 연구하며, 라듐이 단순히 방사선을 내뿜는 물질이 아니라 다른 원소들과 결합하고 고유한 성질을 지닌 원소임을 밝혀냈습니다.
1910년에는 앙드레 드비에른(André Debierne)과 함께 금속 상태의 순수한 라듐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라듐이 주기율표에 들어갈 수 있는 독립된 원소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성과였습니다. 마리가 라듐의 분리를 방사능 과학의 ‘주춧돌’이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1911년, 마리 퀴리는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하고 라듐을 분리했으며, 라듐의 성질과 화합물을 연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의 과학적 한계를 생각하면 마리의 연구는 실로 위대한 업적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극미량만 존재하는 물질을 실험과 분석만으로 추적했으며, 수많은 광석을 처리하고 반복해서 정제하면서 미세한 방사능의 차이를 측정했습니다. 그 끈질긴 과정을 거쳐 새로운 원소의 존재를 입증하고 실제로 분리해낸 것입니다.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이 방사능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고 연구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었다면, 노벨 화학상은 방사능을 내는 물질을 직접 분리하고 그 정체와 성질을 규명한 연구를 평가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마리 퀴리는 인류 최초로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도 물리학과 화학처럼 서로 다른 두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개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는 1911년 노벨상 연회에서 이 영예를 자신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피에르와 함께 라듐과 폴로늄 연구에 모든 것을 바쳤던 만큼,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 노벨상에는 피에르의 연구에 대한 경의도 담겨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리의 연구는 당대 사회에 수많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과학계뿐만 아니라 의료계와 산업계에서도 큰 관심이 쏟아졌고, 특히 의료계에서는 방사선이 생체 조직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미국과 유럽에는 라듐 생산 시설이 등장하는 등 관련 산업도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마리에게는 라듐 생산법을 특허로 등록해 막대한 부를 얻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는 특허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라듐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정작 마리 자신도 연구에 필요한 라듐을 구하지 못해 외부의 지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마리는 순수 과학의 연구 성과는 다른 연구자들도 함께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만든 방사성 물질의 시료를 다른 연구자들에게 제공했고, 산업계에도 라듐 생산 과정을 공개하는 등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마리가 연구에 한창 박차를 가하던 시기, 전 세계를 뒤흔드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입니다. 당시 전쟁터에서는 부상자의 몸속에 박힌 총알이나 포탄 파편의 위치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에 마리는 전선에서 부상자의 상태를 보다 빠르게 파악할 수 있도록 이동식 X선 촬영 시스템을 보급했습니다.
자동차에 X선 발생 장치와 촬영 장비, 전원 공급 장치 등을 싣고 전선 가까이 이동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 차량들은 훗날 ‘작은 퀴리들(Petites Curies)’이라고 불렸습니다. 마리는 장비 확보와 설치, 운영 체계 구축, 인력 교육에 관여했으며 직접 현장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과학자들은 연구실을 나와 직접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다음 세대의 과학자들도 성장했습니다. 마리를 도와 방사선 촬영에 참여했던 딸 이렌 졸리오퀴리(Irène Joliot-Curie)는 훗날 남편 프레데리크 졸리오와 함께 인공적으로 방사성 원소를 만드는 ‘인공 방사능’을 발견했고, 두 사람은 1935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마리의 연구는 방사능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 큰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당시 방사능은 정체가 막 드러나기 시작한 미지의 힘이었습니다. 특히 라듐의 등장은 과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라듐은 극소량만으로도 에너지를 내뿜고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으며, 주변 물질에 영향을 주는 신비로운 성질까지 보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끊임없이 방출된다는 사실은 기존의 물질관을 뒤흔들 만큼 획기적이었습니다.
문제는 라듐의 위험성이 알려지기 전에 그 신비로움과 효능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점입니다. 라듐은 ‘기적의 물질’처럼 여겨져 의약품과 화장품, 치약, 음료, 건강 보조제에까지 활용되었습니다. 라듐이 들어간 물은 활력을 높이고 병을 치료한다고 홍보되었고, 일부 제품은 방사성 물질이라는 사실 자체를 판매 문구로 내세웠습니다. 당시에는 방사선이 인체에 미칠 장기적 피해를 연구자와 대중 모두 충분히 알지 못했습니다.
연구 현장에서도 방사성 물질은 거리낌 없이 다뤄졌습니다. 연구자들은 라듐이 든 용기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거나 책상 위에 보관했습니다. 방사선은 눈에 보이지 않고 즉각적인 통증도 일으키지 않아 반복 노출의 위험을 체감하기 어려웠습니다. 차폐 장비나 노출 기록 체계도 거의 없었고, 안전 취급 기준 역시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920년대 라듐 야광도료 작업자들인 *‘라듐 걸스’에게 턱뼈 괴사와 골암 등 심각한 질환이 발생하면서 장기간 노출과 체내 섭취의 위험성이 분명해졌습니다. 1928년에는 국제 방사선 방호위원회가 설립되어 노출을 줄이기 위한 기준이 마련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방사능의 위험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방사능은 전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한 핵무기 개발로까지 이어지며 그 파괴적 위험성을 드러냈습니다.
마리 역시 오랜 연구 동안 방사선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었고, 1934년 재생불량성 빈혈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확한 노출 기록이 부족해 방사선만을 사망 원인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장기간 노출이 중요한 원인으로 추정됩니다. 마리가 연구한 라듐-226의 반감기는 약 1,600년이어서, 약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연구 노트와 일부 소지품은 방사선을 방출합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연구 노트는 납으로 만든 특수 상자에 격리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과학의 역사를 기록한 노트가 당시 연구 환경의 위험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된 것입니다.
*라듐 걸스(Radium Girls): 라듐이 안전성 검증 없이 폭넓게 사용되던 20세기 초, 야광 시계판 작업 중 반복적으로 라듐에 노출돼 큰 피해를 입은 여성 노동자들로, 방사성 물질 오남용의 대표적 사례
실제로 마리 퀴리의 연구는 폴로늄과 라듐이라는 두 원소의 발견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방사능을 측정해 극미량의 원소를 추적하는 연구 방법을 제시했고, 이는 러더퍼드와 소디를 비롯한 과학자들이 원자의 구조와 방사성 원소의 변화를 연구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후 방사선 치료와 핵의학이 발전하면서 방사능은 현대 의학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방사선 치료는 암세포를 파괴하는 데 활용되며, 엑스선·CT·PET 같은 의료 영상 기술과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진단 및 치료는 수많은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 있습니다.
방사능의 활용 범위는 의료 분야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산업 현장에서는 제품을 훼손하지 않고 내부 결함을 확인하는 비파괴 검사에 방사선이 사용되며, 식품과 의료기기의 멸균에도 활용됩니다. 방사성 동위원소는 재료의 성질을 분석하거나 지하 자원의 위치를 추적하는 데 쓰이고, 원자력 발전소에서는 핵분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전기 생산에 이용합니다. 우주 기술에서는 탐사 장비에 필요한 에너지원으로도 활용됩니다. 우리가 병원에서 받는 검사와 치료부터 안전한 제품의 생산, 전력 공급, 우주 탐사에 이르기까지, 현대 과학은 마리 퀴리의 연구를 바탕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물질 중 하나를 통제하고 활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마리 퀴리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각종 방송, 드라마, 연극, 영화 등에서 소재로 쓰이곤 합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의지를 이어간 여성 과학자,
‘방사능’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한 과학자,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이자 노벨상을 두 차례 수상한 과학자, 그리고 마리를 포함해 퀴리 가족이 받은 총 5회의 노벨상까지,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수식어와 기록은 지금도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하지만 마리 퀴리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 화려한 기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마리는 과학이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고, 자신의 연구가 인류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고 평화에 기여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녀에게 과학은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진심 어린 실천이었습니다.
마리는 1911년 노벨상 연회에서 방사능 연구를 매우 특별하게 표현했습니다. 베크렐이 방사능 현상을 발견한 지 불과 15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수많은 과학자가 연구하고 여러 연구소가 만들어진 하나의 새로운 과학 분야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마리는 자신이 그 새로운 과학이 태어나는 모습을 보았고, 성장하는 데 힘을 보탰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오늘 마리 퀴리를 다시 떠올려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그 너머에는 과학을 모두의 것으로 만들고 평화를 위해 쓰고자 했던 한 과학자의 진심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닿아 있기에, 마리 퀴리의 위대한 과학적 성취는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닐까요?
※ 본 콘텐츠에 사용된 이미지의 일부는 AI로 제작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출처
-노벨화학상 공식홈페이지 https://www.nobelprize.org/prizes/chemistry/1911
https://www.nobelprize.org/stories/women-who-changed-science/marie-curie/
https://www.nobelprize.org/prizes/physics/1903/marie-curie/facts/
-Britannica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Marie-Curie
-Science History Institute https://www.sciencehistory.org/education/scientific-biographies/marie-sklodowska-curie/
-Serious Science https://serious-science.org/marie-curie-6408
이 시리즈는 세상을 빛낸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의 업적을 중심으로, 화학이 만들어온 과거와 현재를 되짚고 그 의미를 오늘의 삶 속에서 함께 살펴봅니다.
원소로 보는 화학사 바로가기 👉️ https://blog.lgchem.com/2017/05/원소로-보는-화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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