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이 바꾼 현대사] Vol.2 에밀 피셔, 분자 합성으로 생명의 베일을 걷다
2026. 02. 25
오늘날 우리는 혈당을 손쉽게 측정하고, 유전자 검사를 통해 질병 가능성을 예측합니다. 단백질 기반 신약과 백신을 설계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식품을 구매할 때는 성분표를 확인하고 저당 제품인지 따져보는 일도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이 모든 변화의 바탕에는 하나의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몸을 이루는 물질도 결국은 ‘분자’이며, 그 구조를 이해하면 설명하고, 만들고, 바꿀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관점을 과학적으로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활동한 화학자 ‘에밀 피셔(Emil Fischer)’입니다. 그는 당시 빠르게 발전하던 유기화학의 흐름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단순히 물질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체에서 발견되는 유기 화합물 역시 일반적인 화학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를 탐구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실험을 통해 하나씩 증명해 나갔습니다.
생명 물질의 구조를 밝히고, 합성으로 증명하는 연구를 통해 생화학의 토대를 다진 인물, 그가 바로 1902년 제2회 노벨 화학상 수상자 에밀 피셔입니다.
*유기화학: 탄소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물질을 연구하는 화학 분야
1852년 독일에서 태어난 에밀 피셔는 아버지의 기대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가업인 목재 유통업을 잇기를 바랐지만, 그는 일찍부터 사업보다 화학에 더 큰 관심을 보였고 결국 과학자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는 본 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한 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노벨 화학상 수상자이자 유기화학의 선구자인 아돌프 폰 바이어(Adolf von Baeyer)의 지도를 받으며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의 초기 연구는 당시 산업적으로 중요했던 염료 화학 분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염료는 탄소를 중심으로 한 대표적인 유기 화합물이었고, 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유기화학의 핵심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그리고 1875년, 그는 ‘페닐하이드라진(Phenylhydrazine)’을 발견합니다. 당시 페닐하이드라진은 단지 새로운 화합물 중 하나에 불과해 보였지만, 이 물질은 훗날 당의 구조를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작은 유기 화합물에 대한 연구가 생체에서 발견되는 주요 유기 화합물의 구조를 밝히는 출발점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후 베를린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그는 연구의 관심을 점차 생명체 내부의 분자로 넓혀 갔습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화학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원자와 분자라는 개념이 정립되었고, 탄소 원자는 동시에 최대 네 개의 다른 원자와 결합될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진 상태였습니다. 즉, 물질을 이루는 기본 단위와 그 결합 원리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이해가 이뤄진 상황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체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물질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른 시선이 존재했습니다. 생명체 안에서 생성되는 물질에는 특별한 ‘생명력(vital force)’이 작용한다는 ‘생기론’이 오랫동안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생체 물질은 실험실에서 완전히 똑같이 만들어낼 수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19세기 중반 이후 생기론은 점차 힘을 잃었지만, 당과 같은 복잡한 생체 분자는 여전히 화학적으로 완전히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실험실에서 합성한 물질이 생명체에서 얻은 물질과 구조까지 동일한지 확신할 수 없었고, 같은 원자로 이루어졌는데도 서로 다른 성질을 보이는 현상 역시 당시 과학자들이 풀지 못한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피셔의 연구가 새로운 해답을 제시하게 됩니다.
19세기 후반, 화학자들에게 당은 익숙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물질이었습니다. 포도당, 과당, 갈락토스는 같은 원자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서로 다른 성질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죠.
피셔는 자신이 발견한 페닐하이드라진을 이용해 당과 반응시키고, ‘오사존(osazone)’이라 불리는 결정 물질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당을 구별하는 분석 체계를 확립하며, 당 연구를 구조적 접근의 단계로 끌어올렸습니다. 그는 이론적으로 만들 수 있는 16가지 종류의 알도헥소스 입체이성질체(원자 구성과 결합 순서는 같지만, 공간에서의 배열이 서로 다른 분자) 가운데 9가지를 직접 합성해 확인했습니다. 쉽게 말해, 같은 재료로 이루어졌지만 배열이 달라 서로 다른 성질을 갖는 당을 실제로 만들어 본 것입니다. 이는 분자의 차이가 단순한 화학식의 문제가 아니라, 원자들이 공간에서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입증한 성과였습니다.
이러한 연구 과정에서 그는 복잡한 3차원 분자 구조를 2차원 평면에 체계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정립했습니다. 오늘날 ‘피셔 투영식’이라 불리는 이 표기법은 당 분자의 입체 구조를 한눈에 비교하고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의 공간 배열을 화학의 언어로 정리함으로써, 자연에서 얻은 당과 동일한 구조의 물질을 이론에 근거해 합성하고 검증할 수 있다는 점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이로써 생체에서 발견되는 유기 화합물은 더 이상 ‘특별한 영역’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구조를 이해하면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순간이었습니다.
피셔의 또 다른 중요한 연구는 오늘날 DNA와 RNA를 이루는 핵심 성분으로 알려져 있는 ‘퓨린(Purine)’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19세기 말, 당시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던 물질들이 있었습니다. 요산은 통풍과 관련된 물질로 알려져 있었고, 카페인은 커피의 각성 성분으로 소비되고 있었습니다. 테오브로민 역시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 등에 들어 있는 물질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전혀 다른 맥락에서 연구되던 물질이었으며, 서로 어떤 구조적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화학적으로는 서로 전혀 다른 물질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 물질들은 모두 사람이나 동식물의 몸속에서 발견되는 성분이었지만, 이들이 어떤 공통 원리로 연결되어 있는지 체계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피셔는 이들 물질을 하나의 체계 안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는 요산, 카페인, 테오브로민이 모두 같은 기본 뼈대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이를 ‘퓨린 핵’이라는 구조로 정리했습니다. 겉으로는 다른 물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낸 것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50종이 넘는 퓨린 유도체를 직접 합성하며 구조를 하나씩 검증했고, 자신이 제시한 분자 구조가 실제로 존재함을 실험으로 입증했습니다. 서로 관련 없어 보이던 생리 활성 물질들을 하나의 구조 원리로 통합한 이 연구는, 생명 화학을 보다 체계적인 학문으로 끌어올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02년, 피셔는 ‘당과 퓨린의 합성 연구’로 제2회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당과 퓨린이라는 핵심 생체 분자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규명하고, 이를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또한 우리 몸속에서 화학 반응을 돕는 단백질인 ‘효소’가 특정한 입체 구조를 가진 분자에만 선택적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는 분자의 ‘모양’이 생명 현상을 좌우한다는 원리를 명확히 보여준 발견이었습니다. 그의 연구는 생명 화학을 단순히 관찰에 머무는 학문이 아니라, 이론을 세우고 실험으로 검증하는 체계적인 과학으로 한 단계 끌어올린 성과로 평가됩니다.
그의 퓨린 구조에 대한 이해는 이후 핵산 연구의 이론적 기반 중 하나가 되었고, 유전자 연구와 백신·항바이러스제·항암제 개발로 이어지는 과학적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후 진행된 퓨린 대사 경로 연구는 요산 축적으로 발생하는 통풍 치료제 개발로도 이어졌죠.
당에 대한 연구 역시 오늘날 우리의 일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당의 입체 구조와 효소가 특정 구조에만 반응하는 ‘특이성’을 밝힌 연구는 생화학에 대한 이해를 크게 확장시켰고, 이는 당뇨병 치료제 개발과 혈당 측정 기술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구조를 규명하고, 직접 합성해 검증하는’ 연구 방법을 확립했습니다. 이 방법은 의약품 설계, 유전자 연구, 효소 공학 등 현대 생명과학과 바이오 산업 전반에 폭넓게 적용되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혁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던 생명의 세계를 분자의 언어로 풀어낸 과학자, 에밀 피셔. 그의 연구는 오늘도 실험실과 산업 현장에서 새로운 발견으로 확장되고 있으며, 생명을 이해하고 질병을 극복하는 과학의 힘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학자는 연구실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또 다른 이름의 영웅일지도 모릅니다.
※ 본 콘텐츠에 사용된 이미지는 AI로 제작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출처
-노벨화학상 공식홈페이지 https://www.nobelprize.org/prizes/chemistry/1902/fischer/facts/
-Science History Institute https://www.sciencehistory.org/education/scientific-biographies/emil-fischer/
이 시리즈는 세상을 빛낸 노벨 화학상 수상자들의 업적을 중심으로, 화학이 만들어온 과거와 현재를 되짚고 그 의미를 오늘의 삶 속에서 함께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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